[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소녀시대 효연

언론사에 처음 입사한 기자들이 흔히 겪는 혼돈 중 하나가 쓰는 글의 톤 변화다. 자기 글을 쓰던 사람이 갑자기 회사의 평가 기준에 맞춰 회사의 글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입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름대로 목표로 한 언론사의 톤 앤 매너에 맞춰본다고 노력했겠지만, 자신이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문법을 송두리째 바꾸는 경험이란 아무리 준비했다 한들 쉽지 않다. 어딘가 내 글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온전히 회사의 색깔이 묻어나는 글도 아닌 것 같은 혼란. 마치 더 이상 아동복을 입기엔 몸이 훌쩍 컸지만 어른들의 옷을 입자니 흉내에 그치는 것 같아서 거울 앞에서 한참 시간을 보내는 사춘기 아이들처럼, 초년의 기자들은 제가 쓴 글을 읽고 또 읽고 거푸 곱씹어보며 울상을 걷어내지 못한다. 제 글 이상하죠. 저 정말 글을 못 쓰는 것 같아요. 회사의 문법과 색깔을 온전히 소화해서 내 것으로 만들고 다시 내 식으로 소화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일러줘도 이들의 낙심은 가시지 않는다. 원래가 그런 것인데도, 남들도 다 당신 같은 시행착오를 겪었음에도.



“실력만으론 안 되는 건가?”

엠넷 춤 경연 프로그램 <힛 더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는 효연을 보면서 잠시 그런 생각을 했다. 매 경연 화제가 되는 무대를 선보이고, 방송이 끝나고 나면 그가 춤을 춘 클립이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지만 아직 우승은 하지 못했다. 어느덧 경연 참가자 중 제일 고참이 된 입장에서 조금은 속이 상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늘 즐거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가 소녀시대 데뷔 무렵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데뷔는 파워풀한 동작이 가미된 ‘다시 만난 세계’로 했지만, 그 이후 활동은 ‘베이비 베이비’라거나 ‘키싱 유’, ‘지’처럼 발랄하고 아기자기한 안무 위주의 곡들로 하게 되었을 때 몹시 혼란스러웠다던 말. 막대사탕을 들고 발랄한 춤을 추는 ‘키싱 유’ 무대를 준비하면서 “내가 사탕을 흔들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팔굽혀펴기를 한 걸까” 생각했다던 말을 새삼스레 곱씹어보니, 효연이 승패와 무관하게 늘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 그는 자기 춤을 추고 있는 거니까.

앞머리에 글쓰기로 예를 들었지만 아마 어느 직군, 어느 조직이나 사정은 비슷할 것이다. 아무리 날고 기는 실력을 인정받은 이라 하더라도, 사적 개인으로 있을 때 일을 하던 방식과 조직의 일원으로 일을 하는 방식 사이의 괴리는 쉽게 적응하기 어렵다. 효연은 데뷔 전 케이블 음악 채널 연말 시상식에서 회사 선배이자 당대 가장 춤 잘 추는 춤꾼 중 하나인 보아의 대역을 할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데뷔한 이후 팀의 노선이 변하자 자연스레 막대사탕을 흔들며 자신의 춤이 아닌 팀의 춤에 자기를 맞춰가야 했다. 춤을 눈부시게 잘 춘다는 점을 무기로 팀의 일원이 됐지만, 춤을 잘 추면 노래를 잘하길 바라고 노래를 잘하면 예쁘길 바라는 가혹한 평가 기준 앞에서 ‘춤을 잘 춘다’는 사실은 좀처럼 음미되지 못했다. 격렬한 댄스 브레이크 중 표정이 잠시 일그러진 찰나의 순간 찍힌 사진은 악질적인 외모 비하의 소재로 쓰였고, 유난히 걸그룹에게 요구하는 바가 많은 분위기 속에서 효연의 진가가 평가되는 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가 춤을 잘 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걸 온전히 존중해주는 이들은 드문 상황, 심지어 그 시간이 제법 길었다.

사회 초년병들이 겪는 고통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나는 나의 일로 존중받고 싶은데, 일만 잘하는 것으론 좀처럼 만족하지 않는 이들이 가득하니까. 회식 자리에서 무뚝뚝하다느니, 회사에 오는 옷차림을 조금 더 신경썼으면 좋겠다느니, 인상이 좋지 않아서 별로 정이 안 간다느니 하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이 업무의 본질을 가린다. 일을 하기 전에는 빛나는 인재라고 평가받던 사람들이 오히려 일을 구하고 나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는 아이러니. 사회가 요구하는 일의 방식에 자신을 맞춰가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동안 세상이 자신을 평가하는 건 일 외적인 요소들이다. 2013년 한국방송 <해피투게더>에 출연했던 효연은 자신의 전성기를 물어보는 질문에 “전성기가 기억이 안 난다”며 회고를 시작하다가 데뷔 전 연습생 시절이 오히려 인기가 많았다는 기억을 끄집어 내며 농담을 섞어 “실력만으론 안 되는 건가?”라고 생각했노라 말했다. 뭐가 부족했던 걸까 물어보는 진행자의 말에 자연스레 손으로 얼굴을 가리키며 효연은 웃었지만, 그가 그렇게 기꺼운 마음으로 웃기까지는 아마 제법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상이 자신의 색깔을 인정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하나? 누군가는 세상과 싸워 협소한 인정의 폭을 넓히고, 누군가는 세상의 문법에 맞춰 자신을 풀어 설명하는 법을 익히고, 누군가는 그냥 포기해버린다. 효연은 어땠을까? 그는 세상과 싸우는 쪽을 택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체념하고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는 꾸준히 소녀시대의 곡들에서 댄스 브레이크 타임을 담당해 무대의 역동성을 담당했고, 자신의 장점인 파핑이나 로킹과 같은 마니악한 춤이 없는 안무도 묵묵히 소화했다. 탈퇴를 해야 하고 유학을 가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도 했지만 그러진 않았다. 그러면 도망가는 게 되어버리니까. 그리고 마침내 소녀시대가 더 이상 발랄하고 귀여운 이미지로 조심스레 애정을 갈구하지 않아도 좋을 만큼의 안정적인 위치를 담보한 이후, 효연은 팀이 강한 콘셉트의 곡들을 시도할 때마다 무대의 중심을 담당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 갓 어 보이’처럼 정신없이 대형이 바뀌며 격하게 춤을 춰야 하는 걸스 힙합 곡에서, 효연은 팀이 감행한 낯선 시도를 대중에게 납득시키는 든든한 기반이 됐다. 팀이 요구하는 문법을 익히고 세상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설명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고 온전히 인정받을 수 있는 타이밍을 기다린 것이다.

‘힛 더 스테이지’ 무대 큰 인기
데뷔 전 보아 대역 맡을 정도로
탁월한 춤 실력 맘껏 뽐냈지만
귀여움 내세운 팀 색채에 가려

싸우지도, 도망가지도 않은 채
장점 숨기고 묵묵히 역할 소화
강한 콘셉트 곡에서 중심 떠올라
온전히 무대를 즐기는 충만함
무언가를 입증해 보일 필요 못 느껴

오랜 노력 끝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여주고 인정받을 기회를 얻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건 얼마나 나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느냐이지, 이기고 지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2012년 방영된 문화방송 <댄싱 위드 더 스타 2>에서 효연은 결승에서 최여진에게 승자의 자리를 내주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지만, 전혀 새로운 장르의 춤을 시도하면서도 스테이지를 압도하는 힘과 매너를 보여주며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평가받았다. 그해 말에는 소속사와 현대자동차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결성된 유닛 ‘유니크’의 뮤직비디오에서 끝판왕과 같은 기세로 등장해 팀 내 남자 멤버들을 압도했고, 다음해 열린 엠넷 <댄싱 9>에는 케이팝 댄스 마스터로 참가해 댄서들을 심사했다. 그리고 더 이상 아무도 그에게 자격을 묻지도 색깔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 기다려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인정받은 이가 누릴 수 있는 성취였다.

그러니 효연이 <힛 더 스테이지>에서 늘 좌중을 사로잡는 무대를 선보이고도 우승을 놓칠 때에도 여전히 잃지 않는 웃음의 정체가, 굳이 더 이상 무언가를 입증해 보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온전히 무대를 즐길 때 나오는 충만함이라고 추측해도 무리는 아니리라. 연습생 7년, 그리고 데뷔한 이후에도 짧지 않은 시간의 혼란을 견뎌낸 끝에 쟁취한 웃음. 그리고 그런 효연의 웃음 덕에 난 일과 자아 사이의 간극, 내가 평가받고 싶은 진가와 세상이 날 바라보는 잣대 사이의 괴리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에게 해줄 말이 하나 더 생겼다. 무엇이든 처음 시작할 때 그런 고민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세상과 부딪혀 싸워서 바꿔낼 자신이 없다고 해서 너무 일찍 스스로 포기를 선언하진 말라고. 저기,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고민을 거쳐온 끝에 마침내 세상 앞에서 호탕하게 웃을 수 있게 된 효연의 춤을 보라고.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연재 4년차인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 명 한 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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